할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어버이날이었다.
어차피 시들 꽃이니까, 그냥 예쁘고 최대한 싼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다*소에 들렸다.
전날까지도 카네이션으로 꽉 찼던 매장이 막상 어버이날에는 카네이션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길가에서 파는 카네이션 바구니를 사서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을 향해 걸었다.
저렴한데 꽃이 싱싱하고 커서 만족하며 걸어갔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며칠 전 엄마께는 예쁘게 꾸며놓은 비싼 카네이션 바구니를 드렸기에,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에게 자주 찾아가지 못했다.
할머니가 보고 싶었지만 '나중에'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 시간이 많을 거라는 합리화로 미뤄왔던 것 같다.
할머니가 잘 보도록 침대 옆 선반에 카네이션을 올려놓으니
할머니가 예쁘다고 했다.
최근 인지능력도 많이 떨어지고, 말을 걸면 반응도 별로 없었다고 하는데,
그날따라 꽃을 보고 예쁘다고 말씀도 하고, 집에 가자는 말씀도 했다.
기력이 없으신지 눈을 감고 있기도 하셨고, 그러다가도 내가 옆에 있는지 눈을 떠서 보기도 하셨다.
피곤해하시는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자주 찾아뵙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지 못했다.
한 달 후, 할머니는 갑작스럽게 건강 상태가 안 좋아지셨고 결국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며 한 달 전 카네이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금 더 좋은 걸로 살걸.’
‘더 자주 갔어야 했는데.’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효도라는 게, 인간관계에서 최선을 다한 다는 것이,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란 것을.
더 많이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상대방이 느꼈을 감정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대다수 내가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의 아쉬움과 후회일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마음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때로는 '호구'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더 많이 애쓰고, 배려한다고 해서 억울하고 속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마음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너무 이해타산 적으로 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세상이란, 인간의 삶이란 그 자체가 공평할 수 없고, 손해 보는 만큼 얻는 것이 있으니까.
머리로 계산하느라 사랑할 기회를 놓쳐버리면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무 애썼다고 섣불리 자책하지 말자.
사랑하는 것이 남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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