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상실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하지만, 눈앞의 가족이 나를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이 옵니다. 말도 대화도 줄어들고, 점점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하게 됩니다. 분명히 함께 존재하는데, 관계는 사라진 듯한 이 상황. 치매 가족이 느끼는 정서적 고통은 피로나 지침을 넘어, ‘상실감’이라는 감정으로 깊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 상실감은 너무나 모호해서, 느끼고도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해도 말할 수 없고, 타인에게 이해를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글은 그런 마음을 꺼내어 함께 살펴보고,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안내하는 위로의 글입니다.

치매 가족이 겪는 ‘보이지 않는 상실감’이란?
모호한 상실
심리학에는 ‘모호한 상실(Ambiguous Loss)’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심리적, 정서적으로는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하죠.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은 정확히 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환자는 여전히 숨을 쉬고 옆에 있지만, 더 이상 우리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예전의 말투도, 성격도, 관계의 따뜻함도 점점 사라져 갑니다. 가족의 역할이 해체되듯 느껴지며, 마치 그 사람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듯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극심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감정은 슬프고 괴로운데, 그 감정을 인정할 수 없거나 이상하다고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데 왜 슬플까?”라는 자책과 의문이 겹쳐지며, 감정을 외면하게 되기도 합니다.
미국의 가족 치료사 폴린 보스(Pauline Boss)가 '모호한 상실'이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하며, “감정이 이상한 게 아니라, 상황이 이상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치매 가족이 느끼는 슬픔, 혼란, 무기력함은 모두 모호한 상황에서 비롯된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죠.
반복되는 애도
반복되는 애도의 심리, 왜 더 고통스러울까요? 일반적인 상실감은 어느 순간 뚜렷하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충격, 슬픔, 애도, 수용, 회복의 단계를 거쳐 지나가죠. 하지만 치매 가족의 애도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반복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입니다.
매일 마주하는 얼굴은 분명 내가 사랑하던 가족이지만,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않고, 반응조차 없을 때마다 마치 또 한 번의 ‘작은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내일 또 반복됩니다.
폴린 보스는 『모호한 상실』에서, “끝나지 않는 슬픔은 우리가 애도를 시작할 수 없게 만든다”라고 말합니다. 애도의 시작도 끝도 모호한 상황에서, 감정은 정리되지 못하고 마음속에 계속 쌓여 정서적 피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치매 가족의 정서적 소진
마음이 멍해지고 무기력해지는 이유
간병을 오래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감정을 무시하거나 차단하게 됩니다. 처음엔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던 상황도 반복되면 점점 ‘감정 없이 행동하는 기계’처럼 변해가죠.
이런 상태는 흔히 ‘정서적 마비’라고 표현됩니다.
- 감정의 고갈
- 대화가 통하지 않는 외로움
- 반복되는 일상 속 자아 상실감
- 희망이 없는 미래에 대한 무력감
치매 환자가 중증 단계로 접어들수록, 가족의 정서적 소통 가능성도 낮아지고, 돌보는 이의 마음은 점점 지쳐갑니다. 그 끝에는 우울감, 불안, 심지어는 자기 혐오감까지 자리 잡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감정을 눌러왔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감정을 무시하거나 차단하는 이유
감정에 휘둘리면 제대로 돌볼 수 없을까 봐
간병을 오래 하다 보면,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두려워질 수 있습니다. 슬픔에 빠지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까 봐, 감정에 휘둘리면 간병을 제대로 할 수 없을까 봐 무서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때로는 감정을 차단하고 무뎌지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 이는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려는 일종의 생존 전략입니다. 그러나 이 전략이 계속되면 정서적 연결감은 점점 사라지고, 간병은 ‘의미 있는 돌봄’이 아닌 ‘의무적인 반복’으로 바뀌게 됩니다.
슬픔과 지침을 느끼는 것, 하지만 감정의 물결에 휩쓸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 그 모든 마음은 잘못된 게 아니라 아주 정직한 ‘돌보는 이의 마음’입니다. 상반된 감정들로 혼란스러운 마음은 당신이 비정상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하고 책임감이 커서 생겨나는 인간적인 감정입니다.
슬픔이 가족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전이될까 봐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면, 다른 사람들도 무너질까 봐…” “내 슬픔이 가족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전이되면 어떡하지…”
그래서 가족 앞에서는 웃고, 모임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신을 억누르며 버티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또한 배려심 깊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 배려가 내 감정을 없애야 한다는 압박으로 이어진다면, 그건 결국 내 마음이 견딜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활기찬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활기찬 마음은 치매 환자를 지속적으로 돌보게 하는 ‘정서적 연료’입니다. 감정심리학에서는 희망, 감사, 웃음, 여유 같은 작은 긍정 정서가 스트레스로 긴장된 뇌를 안정시키고, 간병에 필요한 집중력과 회복력을 유지시킨다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나 자신을 위해 밝은 감정을 선택하는 건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 간병을 위한 정서 관리의 방법입니다.
환자를 돌보기 위한 에너지를 위해 너무 무리해서 억지로 웃지 마세요. 진짜로 웃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한 감정 표현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필요합니다. 5분만이라도 감정을 마주하고, “나는 지금 무섭다, 나는 지금 슬프다”라고 인정해 보세요. 그 감정이 당신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어줄 수도 있습니다.
감정을 ‘무시’하면, 오히려 내면에 쌓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정도로 힘들면 안 되지.”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은데 내가 왜 우울하지?” “이런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걸까?” 이런 감정의 억압은 일시적인 회피는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마음속에 쌓이고 쌓여서 더 큰 불안과 우울, 무기력으로 돌아옵니다. 감정은 인정받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몸이나 행동,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게 되죠.
치매 가족의 상실감과 정서적 소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감정에 이름 붙이기
첫 번째로 중요한 건, 이 감정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그 감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치유는 시작됩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뇌를 안정시킵니다
신경과학에서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뇌의 편도체 활동이 줄어들고, 전전두엽이 활성화된다고 말합니다.
"나는 지금 무기력해", "나는 지금 상실을 겪고 있어", "나는 불안하다"라고 인정하는 순간, 뇌는 감정을 위협이 아닌 정보로 받아들이며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습니다.
이 과정을 "Name it to tame it (감정에 이름을 붙이면 다스릴 수 있다)"라고 합니다. – 미국 신경심리학자 대니얼 시겔(Daniel Siegel)
감정을 인정하면 자기 연민(self-compassion)이 열립니다
감정을 인정하는 것은, “이런 감정을 느껴도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이는 자기 비난의 악순환을 끊고, 자신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자기 연민(self-compassion)으로 이어집니다. 자기 연민은 스트레스 완충 효과, 우울감 완화, 정서 회복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 곧 ‘현실을 수용하는 첫걸음’입니다
특히 치매 가족처럼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는 상황에서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거나 부정하면, 현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슬픔, 분노, 억울함, 고립감 같은 감정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인정하면 비로소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됩니다. 그게 곧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애도 시간 갖기
두 번째로는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가족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해서, 감정까지 억제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운 마음, 슬픈 기억을 마음속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작지만 의미 있는 ‘애도의 의식’을 가져보세요.
예를 들어,
- 가족에게 편지를 써보는 것
- 함께했던 사진을 보며 기억을 떠올리는 것
- 내가 받은 사랑을 기록해 보는 것
이런 의식은 마음속에 자리 잡은 모순적인 감정을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의 방향성을 만들어주는 데 도움이 됩니다.
도움 받기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합니다.
- 지역 복지센터의 간병 가족 모임
- 온라인 치매 가족 커뮤니티
- 심리상담 및 지원 프로그램
지지를 받는 경험은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위안을 줄 수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는 공간에서 감정을 나누는 일은 회복의 큰 시작점이 됩니다.
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말이 그렇게 큰 위로가 될까요?
1. 정서적 고립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치매 가족처럼 일상적으로 큰 심리적 부담을 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상한 걸까?” 이런 생각은 자신을 점점 고립시키고,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키웁니다. 하지만 누군가도 같은 감정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이 주는 정서적 반응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오면서 정서적으로 연결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심리적 회복의 출발점이 됩니다.
2. 자기 비난을 줄이고 자기 연민을 회복시켜 줍니다
고통을 겪을 때 사람들은 자주 스스로를 탓합니다. “내가 더 잘 돌봤으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타인의 공감 어린 경험을 들으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이건 다들 겪는 일이구나’ 하고 자기 비난이 줄어듭니다. 이는 자기 연민(self-compassion)을 회복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연민은 스트레스 회복 탄력성, 우울감 완화, 회복력 향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3. 감정의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해 줍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감정은 이름 붙일 수 있을 때 치유된다.” 공동체 안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내가 느낀 무언가 막연한 슬픔이나 불안이 ‘아, 이건 모호한 상실감이구나’, ‘이건 반복되는 애도였구나’처럼 명확한 언어로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은 내면의 감정을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감정의 통제력을 높여 자기 회복을 돕는 중요한 심리적 도구가 됩니다.
자기 돌봄 루틴 유지
마지막으로, 자신을 돌보는 루틴을 잊지 마세요. 하루 10분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 좋아했던 취미를 잠시라도 다시 해보는 것, 산책이나 명상을 통해 마음의 리듬을 되찾는 것. 이런 작은 자기 돌봄이 곧 정서적 회복의 자양분이 됩니다.
🌿 "Those we love don't go away, they walk beside us ever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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